● 작명·이름 이야기

(20) 이름에 깃든 소망, 피휘, 그리고 개명

작명가 2024. 4. 10. 16:06

 

(20) 이름에 깃든 소망, 피휘, 그리고 개명

임관혁 검사장 (서울동부지방검찰청)

2023-08-23 05:57



 

부모가 지어주신 이름을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된다는 전통적 관념에 따라 우리 법원에서는 개명 허가사유를 매우 좁게 해석하였다. 2005년에야 대법원은 개명신청에 불법적, 탈법적 의도가 개입된 게 아니라면 원칙적으로 개명을 허가하기로 결정했는데 다만, 파산선고 받은 자, 신용불량자, 전과자의 범죄 은폐 목적 사유 등의 경우에는 개명을 불허하고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중에서

 

이조년 형제들과 무병장수

 

섬세한 감성이 물씬 배어 있는 시조 ‘다정가(多情歌)’의 저자는 고려 후기 시인 이조년으로,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고위 관료이기도 하다.

 

이조년(李兆年)은 5형제 중 막내로, 위로 백년(百年), 천년(千年), 만년(萬年), 억년(億年)이 있었다. 자식들이 무병장수하길 바라는 마음을 형제의 서열에 따라 점증법으로 표현한 게 재미있다. 5형제 모두 과거에 급제한 당대의 명문가이다.

이조년 형제와 유사한 이름으로, 조선 중기의 선산 임 씨 5형제인 임천령(林千齡), 만령(萬齡), 억령(億齡), 백령(百齡), 구령(九齡)을 꼽을 수 있는데, 여기서 齡은 연령을 뜻하며, 이조년 형제들과 달리, 형제의 서열과 숫자가 일치하지는 않는다.

 
임억령은 담양부사 등을 지냈고 담양의 명소 식영정(息影亭)에 시를 남겼으며, 임백령은 을사사화에 가담하여 보익공신 1등과 우찬성(종1품)에 올랐다. 형제들의 처신은 달랐지만 우애는 좋았다고 한다.

 

한편, 태종 이방원의 비 원경왕후의 동생들 이름은 민무구(無咎), 무질(無疾), 무휼(無恤), 무회(無悔)이다. 각각 허물, 질병, 근심, 후회가 없다는 것이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이들 형제는 태종의 왕권 강화를 위한 외척 견제의 희생양이 되어 모두 처형당했다.

 

 [왼쪽 사진] 이조년 초상(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오른쪽 사진] 신숙주 초상(보물 제613호). 청주 구봉영당(九蜂影堂) 소장

 

 

신숙주와 형제서열

신숙주의 아버지 신장(申檣)은 대제학을 지냈는데 애주가로 유명했으며 술병으로 51세에 사망했다. 다섯 아들이 신맹주(申孟舟), 중주(仲舟), 숙주(叔舟), 송주(松舟), 말주(末舟)인데, 아들들의 이름에 주(酒)자를 넣고 싶은데 차마 그렇게는 못하여 발음이 같은 주(舟)자를 넣었다고 한다. 본인의 이름이 돛대(檣)이니, 아들들 이름을 배(舟)로 한 것도 재치 있다. 


아들 5명 중 4명의 이름에 형제 서열을 뜻하는 백중숙계(伯仲叔季)를 취했는데, 孟자도 첫째를 의미하며, 막내는 끝을 뜻하는 末자로 대신했다. 이들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


유몽인 형제와 동물 이름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柳夢寅)의 세 형은 몽사(夢獅)·몽표(夢彪)·몽웅(夢熊)인데, 몽자 돌림에 사자·표범·곰·호랑이를 뜻하는 글자를 붙였다. 이름이 너무 강해서일까. 외로운 호랑이 유몽인의 삶은 탁월한 재능과 달리 순탄치 않았다. 유몽인은 인조반정 직후 아들 유약(柳瀹)의 역모를 알고도 말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아들이 역모에 가담한 이유는 유몽인이 지은 ‘상부탄’(孀婦歎, 청상과부의 탄식)이라는 시를 좋아했기 때문인데, 이 시는 ‘인조가 무궁화꽃 같은 남자이지만 자신은 청상과부처럼 끝내 광해군에게 절개를 지키겠다’는 의미였다. 

사육신 박팽년의 사위인 이공린(李公麟)은 꿈에 자라 8마리가 나타나자, 아들 8명의 이름에 오(鼇, 자라), 구(龜, 거북), 원(黿, 자라), 타(鼉, 악어), 별(鼈, 자라), 벽(鼊, 거북), 경(鯨, 고래), 곤(鯤, 곤이)으로 모두 자라나 물고기를 뜻하는 글자를 넣었다. 이들 모두 소과나 대과에 급제하였으나, 삼남 원(黿)은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닮고 싶은 인물의 이름
고려의 김부식(金富軾), 부철(富轍) 형제의 이름은 고려에까지 명성이 자자했던 송나라 시인 소식(蘇軾)과 소철(蘇轍) 형제에서 따온 것이다. 이들은 아버지 소순(蘇洵)과 함께 ‘삼소(三蘇)’로 불렸다. 김부식은 최고 벼슬인 문하시중을 지내고 『삼국사기』를 지었으며, 김부철도 정2품 벼슬을 지냈다.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거이(李居易)는 자(字, 성인이 되면 짓는 이름)가 낙천(樂天)인데,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자가 역시 낙천(樂天)이다. 이거이의 이름과 자는 모두 백거이의 이름과 자에서 따온 것이다. 거이(居易)는 중용(中庸)에 나오는 ‘군자는 편안함에 처하여 천명을 기다린다’는 뜻이며, 자 낙천(樂天)은 주역(周易)의 ‘하늘에 순응하며 운명에 만족하니 걱정이 없다’는 뜻이니, 일맥상통한다.

 
조선 초기의 문신 강희안(姜希顏), 강희맹(希孟) 형제의 이름은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顔回)와 유학의 대가인 맹자(孟子)를 닮으라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조선 중기의 구사안(具思顔), 사맹(思孟) 형제도 마찬가지다.


유교식 이름
심의겸(沈義謙)은 선조 때 김효원(金孝元)과 이조정랑 자리를 두고 거듭 대립하여 동인과 서인으로의 분당 원인이 된 인물인데, 위로 인겸(仁謙), 아래로 예겸(禮謙), 지겸(智謙), 신겸(信謙), 충겸(忠謙), 효겸(孝謙), 제겸(悌謙) 등 8형제이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충효제(忠孝悌), 즉 유교의 8가지 덕목에 따라 이름을 지었다. 유교국가 조선에서 삼강오륜이나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형제들의 이름을 지은 경우는 상당히 많다.


개명, 피휘, 왕이 하사한 이름
고려시대에는 태조 왕건이 호족에게 왕(王)씨 성을 하사하는 사성(賜姓)정책을 펼쳤다. 왕이 공신 등에게 이름을 하사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최지몽(崔知夢)은 왕건에게 삼한을 통일할 길조라고 꿈풀이를 해주자 고려 개국 후 지몽이란 이름을 하사 받았고, 최사전(崔思全)은 어의(御醫)로 선종으로부터 ‘온전히 사고하라’는 뜻으로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이자겸의 난 때 척준경을 설득하여 이자겸을 제거케 한 공로로 인종으로부터 집을 하사받았다.
고려시대에는 병부상서 문공유(文公裕)가 고수(顧壽)로, 무신정권 통치자 최우(崔瑀)가 이(怡)로 이름을 바꾼 것처럼 개명 사례가 간혹 있었다. 유교사회인 조선시대에는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을 고치는 경우가 흔치 않았고, 이름보다는 자나 호를 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개명의 필요성이 적었다. 개명하는 경우에는 이조에서 임금에게 보고하여 승인을 받은 후 예문관에서 증명서를 내주었다.

 
한편, 왕이나 세자의 이름에 들어가는 글자를 피해야 했는데 이를 피휘(避諱)라 한다. 예컨대, 이거이의 아들 이백경(李伯卿)은 이름의 음이 정종(定宗)의 이름 경(曔)과 비슷하다 하여 저(佇)로 개명하였는데, 그 이름 또한 세자(양녕대군)의 이름 제(禔)와 음이 비슷하여 다시 애(薆)로 개명하여야 했다. 또, 정조의 이름이 이산(李祘)이어서 논산의 이산(尼山)은 이성(尼城)으로 바뀌었는데, 정조의 祘 발음을 ‘성’으로 바꾸는 바람에 이성은 다시 노성(魯城)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는 호를 하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컨대, 이삼(李森)은 이인좌의 난 평정에 활약한 공으로 영조로부터 백일헌(白日軒)이라는 호를 하사받았고, 판서를 지낸 서명응(徐命膺)은 정조로부터 보만재(保晩齋)라는 호를 받았다. 귀화한 인물에게 왕이 이름을 하사한 경우로는, 몽골에서 귀화하여 이성계 아래서 활약한 이지란(李之蘭), 임진왜란 때 투항한 왜장 김충선(金忠善) 등이 있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개명이나 성을 창설하는 게 상당히 자유로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성과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서양에서도 예나 지금이나 개명에 별 제한이 없다.


오늘날의 개명
부모가 지어준 특이한 이름 때문에 놀림 받은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너무 흔하거나, 그냥 마음에 들지 않거나, 기타 다양한 이유로 개명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제99조에 의하면, 개명하고자 하는 사람은 주소지를 관할하는 가정법원 등의 허가를 받아 1개월 이내에 신고하면 된다.

그런데, 불과 20년 전만 해도 법원에서는 개명 허가사유를 매우 좁게 해석하여 출생신고서에 이름을 잘못 기재한 경우, 친족 중에 같은 이름이 있는 경우, 이름 발음이 저속한 것을 연상시키는 경우, 이름의 뜻이 나쁜 경우, 이름이 악명 높은 사람과 같거나 비슷한 경우 등으로 제한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된다는 전통적 관념에 따른 것이었다.

2005년에야 대법원은 개명신청에 불법적, 탈법적 의도가 개입된 게 아니라면 원칙적으로 개명을 허가하여야 한다”(2005스26)고 결정했다. 개인의 인격, 행복추구권 등을 강조하는 사회의 흐름을 뒤늦게 반영한 것이다. 다만, 파산선고 받은 자, 신용불량자, 전과자의 범죄 은폐 목적, 잦은 개명신청, 미신적이거나 비과학적인 사유 등의 경우에는 개명을 불허하고 있다.

  

임관혁 검사장 (서울동부지방검찰청)

 

출처 : https://www.lawtimes.co.kr/news/19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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